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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4번 다녀간 백년식당 “秘法은 따로 없다, 상식 지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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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8-0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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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온돌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잠시 기다리자 창호문이 양옆으로 열리더니 교자상이 들어왔다. 불향 그윽한 떡갈비와 매콤한 낙지볶음, 짭조름한 보리굴비, 톡 쏘는 맛이 일품인 갓김치, 구수한 배추된장국, 남도(南道) 밥상에 빠질 수 없는 각종 젓갈 등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도록 들어찬 상이었다. 교자상을 맞든 전남 해남천일식당오현화(64) 대표와 서울해남천일관이화영(57) 대표는서울사람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며 배시시 웃었다.

 

해남 천일식당은조선 백반의 진수를 보여주는 3대 한정식집 중 하나로 맛이 화려하고 푸짐하며 환상적”(유홍준나의문화유산답사기’ 1)이라 평가받는다. 천일식당이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오래된 식당을 흔히백년식당이라고 하지만, 실제 100년 역사를 가진 식당은 국내에서 찾기 힘들다. 2012년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현 한식진흥원)이 선정한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 100에 오른 음식점 중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곳은 7곳에 불과하다(2023년 기준). 그중에서 설렁탕, 곰탕, 비빔밥 등 음식 하나만이 아닌 한식 전반을 총체적으로 맛볼 수 있는 한정식을 내는 집은 천일식당이 유일하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듯, 오래된 식당이라고 맛집은 아니다. 하지만 100년 세월을 버텨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닌 식당이 분명하다. 그 내공의 근원이 궁금해 전남 해남으로 갔다. 창업자인 고() 박성순 여사가 1924년 해남장터에서 시작한 식당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오현화·이화영 두 여성은특별한 비법은 없다. 할머니는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귀찮고 번거로워서, 주위 여건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것들을 고집스럽게 지킨 것뿐이라 하셨다. 우리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하시던 대로 지켜간다는 사명감으로 식당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도 반한환상적 손맛의 여인


천일식당은 해남과 서울 두 곳에 있다. 해남은천일식당’, 서울은해남천일관이다. 창업 당시 이름은천일관이었으나, 식당을 이어받은 며느리 고() 이정례씨가천일식당으로 바꿨고, 1988년부터 박 여사의 손주며느리인 오현화 대표가 운영해왔다. 서울 반포동에 있는해남천일관은 박 여사의 막내딸인 고() 김정심씨가 1990년 시작했고, 박 여사의 외손녀인 이화영 대표가 어머니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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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를 천일관에서 천일식당으로 바꾼 이유는.

오현화: “시어머니(이정례)가 식당을 시할머니(박성순)에게 물려받으면서천일관은 여자 나오는 요정집 느낌이 난다며 바꾸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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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순 할머니가 식당을 시작한 계기는.

이화영: “할아버지가 전남 강진 가난한 양반 집안인 데다 집안일에 관심 없이 밖으로만 다니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주막집 주모는 할 수 없어서 길가에 좌판을 펴놓고 밥이며 국, 나물, 젓갈을 팔았다. 워낙 맛있으니까 군수, 경찰서장 같은 높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체면도 있고 시장까지 찾아가기 번거로우니까 식당을 내라고 할머니를 졸랐다. 허름한 오두막집을 짓고 천일관이란 간판을 걸었다. 그게 1924년이다.”

 

-사람들이 박 할머니가 간을 어찌나 정확하게 맞추는지저울대 같다며 신기해했다던데.

: “손맛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환상의 여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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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네 번이나 다녀갔다 들었다.

: “청와대로도 불렀다. 할머니가 차멀미가 심해 못 가겠다고 하자, 헬기를 보내 태워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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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가장 좋아했다는대갱이포가 뭔가.

: “대갱이는 순천만 펄에서 사는 작은 장어과 생선이다. 정식 명칭은개소갱이라더라. 커다랗게 벌어지는 입 주변에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혔다. 가까이 보면 흉측하고 무섭다. 영화에일리언의 외계 생명체가 대갱이를 모델로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대갱이를 바싹 말렸다가 먹기 전 불에 굽고 방망이로 두드린다. 구수하면서 바삭바삭 십는 맛이 일품이라 술안주로 그만이다. 요즘은 구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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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들이 많이 왔다는데 사인은 이 방에 걸린 작은 액자 하나가 전부다(액자에는 이수성·고건 전 국무총리, 안우만 전 법무장관, 신낙균 전 문화장관, 김성훈 전 농림장관, 연기자 최불암이 남긴 빛바랜 사인 6장만 들어있다).

: “벽에 사인들을 쫙 걸어놨더니 손님들이나도 남기자며 벽에 낙서를 해대는 통에 다 떼어버렸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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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할머니가 제일 잘 만든 음식이 젓갈이었다고.

: “외할머니는 철마다 열 가지 정도 젓갈을 담갔는데, 곰삭은 듯한 감칠맛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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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

: “시어머니(이정례)는 할머니가비법이란 건 없다고 했다고 전하셨다. 무엇보다 좋은 재료를 구하는 데 신경 썼다. 장보기를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어디든 달려가서 비싼 값을 주고라도 사왔다. 제주 추자도에서 멸치젓 배가 들어오면 보통 옹기 1000개가 실려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국자로 옹기 속을 뒤집어보면서합격이라고 하면 오른쪽에, ‘불합격이라고 하면 왼쪽에 상인이 옹기를 내려놨다. 속이 빨갛고 고소한 냄새 나는 젓갈만 사가지고 오는데 보통 500옹기를 사오셨다고 한다.”

: “할머니는 김장용 배추를 멀리 나주 남평들까지 가서 사오셨다. 하루 종일 그 넓은 들을 돌아다니며 배추를 골랐다. 그렇게 보고 자라선지 나도 김장 김치를 구하려고 적어도 배추 산지 세 곳은 가본다. 고춧가루도 산지에 가서 고추를 직접 십어서 맛본 다음 사들인다. 같은 산지라도 매년 맛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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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은 아니더라도 다른 집에 없는 음식은 없나.

: “김치에 고춧가루, 젓갈, 마늘 등 다른 양념과 함께 돼지고기를 넣는다. 간 돼지고기를 아무 양념 없이 살짝 볶아서 다른 재료와 버무려 배춧속을 채운다. 다 익었을 때 보면 고기가 삭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먹어보면 고기 감칠맛이 김치에 배 깊은 맛을 낸다. 서울 해남천일관에서 내고 있는반지김치는 소고기 양지머리를 푹 고아서 식힌 다음 기름을 다 걷어낸 뒤 낙지, 새우, 표고, 밤 등 갖은 채소를 곁들여 담근 백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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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식당 하면 떡갈비가시그니처 메뉴인데.

: “시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떡갈비가 없었다. 시어머니(이정례)가 만드셨다. 시대가 바뀌면서 일식집, 갈비집, 홍어집 등 한두 음식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리도 뭔가 특색 있는 음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떡갈비를 팔기 시작했다.”

: “소갈비에서 살을 발라내 가로세로 1cm 크기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다. 고기 십는 맛이 살도록 너무 잘게 다지면 안 된다. 간장과 육수, 설탕, 참기름을 섞어 만든 양념에 버무려 30분 정도 치댄다. 그래야 고기가 서로 잘 붙어서 구울 때 떨어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한다. 이틀 정도 양념에 담가 숙성시킨 뒤 석쇠에 올려 숯불에 앞뒤로 굽는다.”

식당을 이은 건 운명


교수 집안 고명딸인 오현화 대표와 대학에서 오보에를 전공한 이화영 대표는식당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입을 모았다. 두 여성은이런 걸 운명이라 해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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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하던 식당을 잇게 된 계기가 있나.

: “대학에서 남편을 만나 연애 끝에 1985년 결혼했다. 남편이 광주에서 사업을 했기 때문에 명절에만 일주일씩 와서 외상장부 정리 등을 도왔다. 그런데 1988년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올림픽 기간이라 손님이 말도 못하게 많았다. 시어머니 병수발 들면서 대신 장사도 했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괜찮아지셔서 광주로 돌아갔는데, 다시 쓰러지셨다. 식당 운영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35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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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가 아니라 억지로 떠맡은 듯한데.

: “옛날에 부모님이 사주 잘 본다는 이를 찾아갔다. 말하지도 않았는데일곱 살 딸이 있지 않느냐고 묻더니부식(음식) 계통 일을 하면 엄청난 돈을 벌 것이라고 했단다. 결혼 후 옷장사를 해보려고 백화점 상가를 임대하려다 계약이 틀어졌다. 점쟁이가 ‘1년만 기다려라. 돈통만 쳐다보면 돈이 들어오게 돼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이 딱 1년 만에 쓰러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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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전혀 소질이 없었나.

: “친정 엄마가 맛있게 하셨다. 학교 가면 친구들이 도시락 반찬을 다 뺏어 먹었다. 엄마가 전주 천석꾼집 큰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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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천일식당이 잘되는데 어머니 김정심씨는 왜 서울에 해남천일관을 냈나.

: “‘언젠가는 한정식집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으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사십 넘어서 얻은 막내딸이라 늘 데리고 다니셨다. 사람들이 외할머니 손맛을 엄마가 가장 빼닮았다고 했다(조선일보,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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